연구를 포기한 이유
1학년 때 몰입해서 소프트웨어 개발을 했던 시기가 있는데, 그 순간을 떠올려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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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12시간씩 개발을 하면서도 재밌고 질리지 않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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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족한 게 너무 많지만, 스펀지처럼 모든 걸 학습 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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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학습 방식의 러닝 커브가 굉장히 가파르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때 느낀 몰입을 연구에서는 더 이상 찾지 못했다. 컴퓨터 비전과 인공지능을 좋아하지만, 연구가 맞는 길이 아닐 수도 있다는 걸 느꼈던 한 해였다.
군대 시절, 머신러닝을 독학하고, Fei Fei Li 교수님의 스탠포드 강의를 유튜브로 들으면서 배울 땐 매일 설레는 감정으로 공부했다. 미국 박사를 하고 싶다는 꿈꾸기도 했다. 군대 싸지방에서 매일 밤 내가 가고 싶은 컴퓨터 비전 연구실 웹사이트를 들락날락했다.
전역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교수님들께 컨택 메일을 돌렸고, 전역한지 일주일만에 컴퓨터 비전 학부 연구생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처음 몇 개월은 정말 재밌었다.
교수님의 지도를 받으면서 실험을 주도적으로 100편 이상의 논문을 읽고 구조화하는 과정을 거치니 머릿속에서 연결이 일어나는 경험을 했다. 학회에 가서 다른 분야의 연구자들과 교류도 해보면서 연구자의 삶을 간접경험 했다. 그리고 PhD 학위의 의미를 알게 되었다. (어렴풋이나마..)
적절한 dataset 찾고 training 돌려보고, evaluation하고, 기록하고, 결과가 안 나오면 왜 안 나왔는지 원인을 생각하고 tuning parameter 바꿔서 다시 돌려보고, 그 사이사이에 모르는 것들이 쏟아져 나왔다.
이 과정이 초기 스타트업이 MVP를 찾는 과정과 상당히 유사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모든 스킬 셋을 이용해서 빠르게 iteration할 수 있는지가 연구도 중요했다.
하지만 곧 현실과 너무 큰 괴리감을 느꼈다. 실제 사람들이 느끼는 문제를 내 연구로 해결할 수는 없겠다는 약간의 자괴감이 들기 시작했다.
여름 방학이 되었다. 평일엔 창업, 주말에는 연구를 했다.
학습 돌려놓고 남은 시간에 IR덱을 다듬고 고객인터뷰를 했다. 하루에 미팅 여러 개를 뛰고 집에 와서 밤새워서 다음 날 논문 스터디 자료를 준비하는 일상이 몇 번 반복되니까 지치기도 했다.
무엇보다 가장 큰 문제는 ‘몰입’이 안 된다는 것이다. 더 이상 머릿속에서 아무런 연결이 일어나지 않았다.
2학기가 시작되었고, 시간이 더 부족해졌다.
학업에 소홀히 할 수 없었던 나는 기본기를 쌓겠다는 핑계로 연구를 중단했다. 학교 공부에 충실히 하고 싶었지만, 관성 때문인지 다른 일을 벌이기 시작했다.
아마 지도교수님도 내가 더 이상 연구에 흥미가 없다는 것을 느꼈을 것이다. 박사까지 하겠다고 해놓고 이러고 있으니 아마도 배신감을 느끼셨을지도 모르겠다. 결국, 고민 끝에 연구실을 그만두게 되었다.
후련했다.
교수님과의 마지막 미팅에서 앞으로의 행보를 응원한다는 격려를 뒤로하고 자리를 나왔다. 동시에 내가 나아가야 할 길이 선명해졌다. 내가 하고 싶은 것은 매일 최신 AI의 프론티어를 쫓는 것이 아니었다. 실제 사람들이 겪는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었다. 미국 박사라는 오랜 꿈을 접고, 9개월이라는 짧지도 길지도 않은 시간 동안 해온 연구를 포기한다는 것이 나에게도 쉬운 결정은 아니다.
하지만 더 두려운 것은 따로 있었다.
몰입할 수 없는 일을 5년 이상 할 자신이 없었다. 이게 더 불행한 삶인 것 같았다.
내가 몰입할 수 있는 대상이 무엇인지 알았다면, 나에게 더 의미 있는 삶이 무엇인지 찾았다면, 이젠 하루 하루 최선을 다해 살아내야 한다.